이생각저생각/이런저런 이야기

창밖의 두가지 세상

리챠드기우 2006. 3. 18. 20:22

 

어젯밤 퇴근하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엘리베이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바로 건너편 LG트윈빌딩의

 

속이 훤이 들여다 보였다.

 

색이 있는 창이라 낮에는 속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밤이 되자 훤한 사무실이 마치 영화처럼 보였다.

 

그런데

 

7층에서 바라보고 있는 내가 이상하게 느낀 것은

 

얇은 벽 하나를 두고서 두 사무실의 분위기 사뭇 달랐다.

 

왼 편은 컴퓨터에 디스켓과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커피를 먹다남은 듯한 머그잔이 뒹굴고 손때 묻은 책상과 비품들이

 

꽉 차 있었지만

 

오른편엔 하얀 천이 곱게 펼쳐진 채 그 위에 빨간 초가 타고 있고

 

드라마 '웨딩드레스'의 분위기처럼 엷고 어두운 오렌지 조명속의

 

세상이었다.

 

몇 센티도 되지 않는 두께의 벽을 두고 사무실과 고급 레스토랑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어떤 기분일까…

 

끔찍했던 장소에 사랑하는 사람과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을 때,

 

슬피울다 쓴 편지를 부치지 못하고 훗날 그 눈물자욱이 말라있는 편지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불행한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쓴 일기가 훗날 행복에 눈물겨워할 때

 

낡은 옷가지 속에서 묻어 나왔을 때,

 

어젯밤 사고로 죽은 동료의 업무일지를 들추어보고 그 사람의 손때로

 

끈적끈적한 키보드를 눌러 볼 때,

 

겨울밤 집밖으로 쫓겨나 거친 벽에 기댄체 달을 보며 자신을 학대한 계모를

 

원망하다 나이들어 우연히 거친 담벽에 기대어 달을 바라볼 때.

 

 

생각을 멈추게 하고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게 만드는 이런 어울리지 않는

 

시간과 공간과 대상들이 퇴근하다 계단에서 잠깐 멈춘채 밖을

 

바라본 순간에 한꺼번에 쏟아졌다.

 

 

- 1997년 여름에 여의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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